Heimatgeschichte · Guri-si ·

구리시: 역사

구리시: 역사

=== 연표 ===
983년 (고려 성종 2년) : 양주목이 되었다.
1395년 (조선 태조 4년) : 양주부로 승격되었다.
1410년 (조선 태종 10년) : 양주목으로 승격되었다.
1413년 (조선 태종 13년) : 양주도호부로 강등되었다.
1466년 (조선 세조 12년) : 양주목으로 승격되었다. 이와 함께 구리시의 전신이 되는 구지면 설치.
1914년 4월 1일 : 구지면의 10개리와 망우리면의 15개리 그리고 노원면의 장기리와 갈매동, 미음면 수변리와 석도리 각 일부, 진관면 배양동 일부, 별비면 퇴계원리 일부를 병합하여 구지면의 "구(九)"자와 망우리면의 "리(里)"자를 따서 구리면이라 하였다.
1963년 1월 1일 : 구리면의 망우산 서쪽 지역(상봉리, 중화리, 묵동리, 망우리, 신내리)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 : 구리면이 구리읍으로 승격하였다.
1980년 4월 1일 : 양주군에서 분리·신설된 남양주군에 속하였다.
1986년 1월 1일 : 구리읍이 구리시로 승격하여 남양주군에서 분리되었다.
2024년 8월 10일 : 별내선이 개통되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고리국(古離國) 또는 모수국(牟水國)으로 비정된다. 이병도는 진접읍 일대의 고구려대 지명인 골의노현(骨衣奴縣) 중 "골의"가 "고리"와 발음이 유사함과 광개토대왕릉비의 정벌한 백제의 성 목록에 아단성 다음에 위치한 점을 들어 고리국으로, 천관우는 양주지역의 고구려대 지명인 매성현(買省縣) 중 "매성"이 "모수"와 발음이 유사함을 들어 모수국으로 비정하였다.

286년에 구리시는 백제의 영토로, 고구려와의 최전선 국경 지역이자 수도의 방위를 위해 아차산성을 축조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영락(永樂) 6년(396년)에 백잔(百殘)을 공격해 아단성 및 고리성을 수취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 고구려의 땅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475년 이전에 구리 및 광진구 등 아차성 부근은 이미 백제의 땅이 되었으며 475년에 장수왕에 의해 구리시는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아차산성의 마당바위 밑에는 급조된 무덤 유구가 있는데, 이때 사망한 개로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구려는 진접읍 일대의 땅을 한산주(漢山州) 북한산군(北漢山郡) 골의노현(骨衣奴縣)으로 명명하였는데, 구리시 일대도 이에 속했다고 추정한다.
이후 평원왕 승하년인 590년에 아차산성 부근에 신라군이 주둔하였음을 토대로 신라 진흥왕 14년(553)의 한강 하류 지역 공격 때에 구리 지역의 소유권이 신라로 넘어갔다고 간주한다. 그 후에 신라와 고구려가 이 지역에서 자주 충돌하다가, 장한성 부근에서 고구려군을 격퇴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는데, 이 장한성을 아차산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이때 신라의 영토로 굳어진 시기를 신라의 북한산주(北漢山州)가 세워진 신라 진평왕 26년(604)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 이전까지 구리시 부근은 신라 신주(新州)에 속하였다.
이후 경덕왕은 재위 16년(757)에 고구려의 골의노현을 황양현(荒壤縣)으로 개명하였다. 아차산의 발굴 조사 결과 "北漢受國蟹口船"라는 명문이 새겨진 6세기 후반~9세기 중반의 신라 토기가 발굴되었다.

삼국사기 궁예전에 처음으로 양주와 견주의 기록이 나오고, 고려사에는 견훤에게 양주를 하사한 기록이 등장한다. 이후 고려의 사료에서 구리 지역에 대한 기록이 따로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 시대에는 양주군 검암산 일대에 동구릉이 조성된다. 그 시작은 건원릉으로, 태종 8년인 1408년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김인귀가 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검암산을 하륜에게 추천한 것이 받아들여져 건원릉이 현재의 위치에 조성된다. 이후 조선 성종 때인 1530년에 작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구지(龜旨)와 망우리(忘憂里)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구지의 어원에는 한강과 왕숙천이 맞대고 있는 뾰족한 형상이 곶과 같다고 하여 '곶이'라 불렸는데, 이후 고지에서 구지로 변하였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고언백이 동구릉이 위치한 검암산에 2개 보루를 설치하여 일본군을 물리쳤다.
규장각 출판의 《호구총수戶口總數》에서는 18세기 중반 양주목 소속의 34개 면과 140개 리를 볼 수 있는데, 이때 구지면에 일패리(一牌里), 창리(倉里), 이·삼·사패리(二·三四牌里)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여지도서》를 통해 당시 구지면에 488호 1,558구가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 숙종 28년(1701) 1월 11일 기록에서는 희빈 장씨의 묘소를 정하기 위한 계에서 인장리(仁章里)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같은 장소가 숙종 26년(1700) 이전에는 인장리(茵匠里)로, 영조대의 기록에도 인장리계(茵匠里契)로 묘사되었다. 순조 11년(1811) 5월 9일 기록에서는 망우현을 지나 인장리(人長里)를 거쳐 동창(東倉)에 이른다는 표현이 나타난다.
고종 3년(1866) 9월 4일 기록에서는 동창리(東倉里)와 사노리(四老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같은 지역이 고종 36년(1899) 4월 7일 기록에서는 사노리(沙老里)로 표기된다. 고종 11년(1874) 2월 11일 기록에서 구지면에 세교리(細橋里)의 존재를 볼 수 있고, 13년(1876) 5월 6일 기록에서는 대교리(大橋里)의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1871년 간행된 경기읍지의 지도에서 구지면(九旨面)의 표기를 처음 확인할 수 있고, 고종 28년(1891) 5월 8일 승정원일기에서 역시 구지면(九旨面)의 표기를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는 구지(龜旨)였던 지명이 최소 1871년부터 구지(九旨)와 혼용되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1895)》에서는 벌리(伐里)와 토막리(土幕里)의 존재가 나타난다. 이 벌리를 벌판의 가차로 해석하여 평촌리(坪村里)의 기원으로 본다. 1908년 1월 29일에 김규식이 이끄는 13도 연합의병진이 일본군과 전투한 기록에서 수택리를 확인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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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lle: Text: Wikipedia – „구리시“, Autorinnen und Autoren (Versionsgeschichte), CC BY-SA 4.0 · Foto: Edmund Mevissen,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