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성군: 역사
일제강점기까지는 9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43년 수풍댐의 건설로 압록강가의 군청을 비롯하여 창성면(昌成面)·전창면(田倉面)·창주면(昌洲面)이 수몰되어 창성면(昌成面)·전창면(田倉面)·창주면(昌洲面)·우면(祐面)을 창성면(昌成面)으로 통합하고, 우면 지역으로 군청을 이전하였다.
1952년의 행정구역 재편에 의해, 동남부의 동창면·대창면·청산면이 동창군으로 분리되어 옛 창성군의 창성면· 신창면으로 구성된 창성군(1읍 18리)이 재편성되었다. 현재는 1읍 1로동자구 15리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2013년 6월 14일에 김정은이 창성혁명사적관을 둘러보며 "대원수님들의 혁명 사적이 가장 많이 어려 있는 창성군을 인민의 낙원으로 더 잘 꾸려 창성땅에서 '사회주의 만세' 소리가 더 높이 울리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북한은 김형직이 1920년대 초 일제 감옥에서 출옥 후 평북 창성, 의주, 삭주 등 일대에서 반일 결사체 '조선국민회' 지하조직을 복구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또, 1950년대 말 6·25전쟁 당시 북상하는 유엔군에 밀려 평안북도의 깊은 산골로 후퇴했던 김일성이 그해 10월께 창성군 창골 지역의 농가에 한동안 머물렀던 적이 있다. 뒤이어, 조선중앙통신은 김일성은 108차례, 김정일은 60차례나 창성군을 방문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