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시: 역사
=== 고대 및 삼국 시대 ===
평양은 옛부터 평평한 땅, 벌판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부루나', '바라나'라고 불렀는데, 이를 이두로 바꿔서 '부루'가 '평'(平), '나'가 '양'(壤)이 되었다. 평양은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였던 왕검성이 있었던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 중 하나이다. 427년에는 장수왕이 고구려의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다. 평원왕 시대였던 586년부터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까지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던 평양성이 위치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고려 시대(高麗)에는 서경(西京)으로 불려 중요시되어, 황폐해진 평양을 부흥시켰다. 947년 고려 정종(定宗)은 도참설에 따라 서경성(西京城)을 쌓고 천도하려 하였으나 귀족들의 불만과 백성들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고, 1136년에는 고려 인종(仁宗)에게 묘청(妙淸), 정지상(鄭知常), 백수한(白壽翰) 등이 서경천도론을 건의하여 추진되었으나, 김부식(金富軾)을 중심으로 한 문벌 귀족들의 반발과 민심의 이탈로 인종이 중지를 명함으로써 좌절되었다.
고려 말기 신돈(辛旽)은 공민왕(恭愍王)에게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선 시대(朝鮮時代)에도 평양은 조선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이자, 평안도(平安道) 감영 소재지로서 관서 지방의 행정 중심지였다.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 때는 청군(淸軍)과 일본군 사이의 격전지가 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1896(건양 1)년 평안도가 남북으로 분할되자 평안남도에 소속되었다.
구한말기에는 기독교가 크게 확산되었는데, 1901년부터 평양에서는 평양신학교라는 장로교 신학교가 문을 열었고, 최초의 장로교 목사들을 배출하였다.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는 오랜기간동안 지역차별에 영향을 받은 것들이 적지 않게 있어서 지역 향반(향리)와 일반 평민의 삶은 차이가 크게 없었다. 이 때문에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에서는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평민문화 및 상업문화가 일찍이 발달하였고, 기독교 신자가 상당히 많이 거주했었다.
1902년 대한제국 고종은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육성하고자 하여 풍경궁을 설치하였으나, 러일전쟁으로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1913년 조선총독부는 평양을 부(府)로 지정했으며, 1914년 평양부의 영역을 시가지 일대로 축소시키고, 교외 지역을 대동군으로 분리하였다. 1938년 대동군 대동강면, 서천면, 추을미면을 편입하여 영역이 확장되었다.
1920년 조만식을 중심으로 민족 운동의 일환인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났다.
만보산 사건(萬寶山事件)의 여파로 평양에서 1931년 7월 5일과 6일에 일어난 반중(反中)·반화교(反華僑) 폭동은 극심해, 중국인 수백 명이 사망, 부상 및 실종되었다.
광복 후 38선 이북은 소련군정(蘇聯軍政)이 들어섰다. 1948년에 소련군이 철수하였다. 1946년 9월 1일에는 삼팔선 북부 지역의 실질적인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평양부는 평안남도에서 분리되어 중구역, 동구역, 서구역, 남구역, 북구역의 5개 구역을 포함하는 평양특별시로 승격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이 1950년 10월 1일에 38선을 넘자, 이후 어언 여드레가 지난 10월 9일에, 김일성의 북 인민군 부대와 인민 정부, 로동당 등 주요 기관이 평양에서 모두 철수하였다.
1950년 9월 28일에 대한민국이 서울을 수복(收復)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수뇌부와 주요 기관, 단체, 부대 등을 평양에서 후퇴시킬 준비를 시작하였다. 10월 1일에 대한민국 국군이 38선을 넘자 10월 9일부터 본격적인 평양 후퇴작전이 전개되었고, 10월 19일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이 평양을 수복하였다. 평양에서 후퇴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한때, 자강에 있는 '강계'를 임시 수도로 정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은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하였으나, 10월 24일 온정리 전투를 시작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 10월 25일 1차 공세를 시작한 중국인민지원군은 11월 26일부터 본격적 공격을 개시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2월 6일에 드디어 평양으로 재입성하였다. 남한의 국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였다.
1952년 8월 1일에, 행정 구역 체계를 기존의 4단계에서 3단계로 개편하면서 평양직할시로 변경되었고, 1956년에 만경대구역과 서성구역을 신설하였으며, 1967년부터 본평양(本平壤), 서평양(西平壤), 동평양(東平壤)으로 나누고, 1972년 1월 1일에는 임시수도가 아닌 공식 수도가 되어 평양특별시로 재승격되었으나, 이후 평양특별시는 2006년 1월 1일에 평양직할시로 다시 격하되었으며, 그 2006년 당시에, 19개 구역 4개 군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편 평양은 한국 전쟁 때 미국의 폭격으로 인해, 공공 건물과 공장 건물들이 모두 많이 파괴되었으며, 보통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버려서 도시의 원래 본 모습을 잃어버렸다. 전쟁 이후 소련으로부터 도입된 조립식 건축기법과 시멘트 가공공업의 발달로 동평양과 평양시 중구역에 5층 내지 15층짜리 고층 아파트가 건설되었으며, 천리마(千里馬)거리와 창광거리, 평양역 앞 역전(驛前)거리를 비롯한 큰 도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010년 1월 1일, 평양에 속했던 중화군, 상원군, 승호구역과 강남군이 황해북도로 이관되었다가, 이듬해인 2011년 1월 1일에, 이들 중 강남군만 평양직할시로 재편입되었다.
평양직할시가 2013년 9월 9일에 평안남도 평양시로 재차 격하됨과 동시에, 구 자강도 향산군 묘향산구역이 평안남도 평양시 모란봉구역으로 편입되었다. 2018년 2월 10일에는 구 평안북도 구성시 방현동이 평안남도 평양시에 편입되었다.
평양은 도농통합형 도시를 추구하고 있으며, 평양 전체의 토지 중 시가지 면적은 20% 이하이고, 농지 면적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어 농산물의 자급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