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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 역사

평택시: 역사

=== 선사 시대 ===
평택 지역은 차령산맥에서 뻗어 내린 완만한 구릉과 안성천·진위천 유역의 평야가 만나는 지형으로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기에 유리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포승읍에 있는 원정리 유적은 1994년 아주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를 거쳐 1995년 11월부터 약 7개월간 아주대학교 박물관과 서울대학교 조사단이 공동 발굴한 복합유적이다. 구석기 시대의 석영제 밀개·긁개·톱니날, 신석기 시대의 금강식 토기 구연부와 석착·석도, 청동기 시대의 점토대토기·타제 괭이머리·마제석부·석촉·돌낫·타날문토기편 등이 함께 출토되어 이 일대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사람이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이 유적은 1997년 4월 26일 평택시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었다.
청동기 시대 유적으로는 고덕면 소사동 유적과 오성면 양교리 유적이 대표적이다. 소사동 유적은 2004년 10월부터 2006년 9월까지 고려문화재연구원이 발굴했으며, 청동기 시대 주거지 81기를 비롯해 원삼국 시대 토광묘 1기, 중·근세 묘 190기 등 모두 365기의 유구가 확인되어 청동기 시대에서 원삼국 시대로 이어지는 거주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양교리 유적은 2006년 8월부터 2008년 5월까지 같은 기관이 발굴했으며, 세장방형·장방형·방형·원형 등 다양한 형태의 청동기시대 주거지 44기와 석관묘 2기가 확인되어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는 취락의 변천 양상을 보여준다.

==== 삼한 시대 ====
삼한 시대 평택 일대에 있었던 마한 소국에 대해서는 명확한 정설이 없다. 평택시사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평택시〉 항목은 팽성 지역을 신분활국(臣濆活國), 진위 지역을 모수국(牟水國)에 비정하고 있으나 이 두 소국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별도 항목은 평택·팽성·진위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각각 경기도 안성·가평 및 수원·양주 등을 유력한 위치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팽성=신분활국, 진위=모수국이라는 비정은 지역사 서술에서 통용되는 견해일 뿐, 마한사 연구에서 확립된 통설로 보기는 어렵다.

백제는 온조왕 대에 영역을 남으로 넓혀 이른바 '웅천(熊川)'에 이르렀다고 전하는데, 이 웅천을 지금의 안성천으로 보는 견해와 금강으로 보는 견해가 함께 있다. 이 무렵 평택 서부(팽성 일대)는 하팔현(河八縣)으로 불렸다고 전하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와 함께 인접한 아산 지역의 백제 현이었던 아술현(牙述縣)에 팽성 일대가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함께 소개하면서 이 시기의 정확한 연혁은 확인되지 않는다고 서술한다. 평택 동부(진위 일대)는 금산현(金山縣)·송촌활달(松村活達) 등으로 불렸다고 전하는데, 이 명칭이 백제 시기의 것인지 후대 고구려 지배기의 이칭인지는 출처에 따라 서술이 엇갈린다.
5세기 후반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함락시켰고,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아산만·안성천 일대를 경계로 대치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이 시기 지금의 안중 지역은 상홀현(上忽縣), 진위 지역은 부산현(釜山縣)으로 불렸다. 이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평택 일대도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었다.
이 시기 조성된 성곽 유적으로는 안중읍 용성리의 평택 자미산성지와 청북읍 옥길리의 평택 무성산성지가 있다. 두 유적 모두 2005년 10월 17일 경기도 고시 제2005-326호로 각각 경기도 기념물 제203호(자미산성지)·제202호(무성산성지)로 지정되었다. 자미산성은 정상부를 두른 토축 내성, 7~8부 능선을 따른 석축 외성, 동쪽 능선의 부성으로 이루어진 삼중 방어체계를 갖추었으며 2004년 평택시가 시행한 발굴조사에서 내성에서는 청동기 시대 무문토기류와 백제 시대 타날문토기류가, 외성에서는 신라 시대 토기·기와류가 출토되었다. 무성산성은 둘레 약 547 m의 테뫼식 토축 산성으로, 1999년 경기도박물관의 지표조사와 2004년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를 통해 청동기 시대 무문토기부터 백제 시대 타날문토기, 신라~고려 시대 기와·토기류까지 폭넓은 시기의 유물이 함께 확인되었다.
신라는 757년(경덕왕 16년) 전국 지명을 한자식으로 일괄 개편하면서 부산현을 진위현(振威縣)으로, 하팔현을 팽성현(彭城縣)으로 고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진위'·'팽성'이라는 지명이 이때 처음 만들어졌다. 진위현은 수성군(水城郡)의 영현이 되었다.

경덕왕대의 지명 개편 이후에도 '평택(平澤)'이라는 이름 자체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평택시사에 따르면 '진위'라는 지명은 삼국시대부터 쓰였으나 '평택'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야 문헌에 처음 나타나며, 삼국 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평택 서부 지역은 하팔현·팽성현으로만 불렸다.

고려 전기 진위현은 수주(水州)의 속현으로 편제되었으나, 1172년(명종 2년) 진위현에 감무(監務)가 파견된 것을 계기로 점차 속현 지위에서 벗어나 현령관으로 승격되었다. 다만 15세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진위현이 수원도호부 관할의 독자적인 현으로 기록되어 있어, 시기에 따라 행정적 지위에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팽성현이 '평택현'으로 개칭된 시점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940년(태조 23년) 팽성현이 평택현으로 개칭되어 천안부(天安府)에 속하게 되었다고 명시하는 반면, 평택시사는 936년(태조 19년) 후백제와의 최후 결전 무렵 평택이 천안 지역에 속하게 되면서 천안의 배후기지로 편입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어, 두 기록이 정확히 같은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후 1009년(목종 12년) 5도·양계 행정구역 성립으로 이 지역이 양광도(오늘날의 충청도 일원)에 편입되었고, 1018년(현종 9년)에는 용성현·광덕현·영신현 등이 수주의 속현으로 편성되는 등 성종~현종대에 걸쳐 지방제도가 정비되었다.
고려 후기인 1236년(고종 23년) 8~9월에는 몽골(원)의 침입군 약 100여 명이 온수군(온양)에서 남경을 거쳐 평택·아주(아산)·하양창 순으로 주둔했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이는 문헌상 '평택'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이른 사례이기도 하다. 이와 달리 고려 후기 왜구가 평택 지역을 직접 침입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아산만 일대에 대한 본격적인 간척 기록 역시 고려 시대가 아니라 조선 시대 문헌에서부터 나타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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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lle: Text: Wikipedia – „평택시“, Autorinnen und Autoren (Versionsgeschichte), CC BY-SA 4.0 · Foto: USAG- Humphreys, CC BY 2.0 –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