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imatgeschichte · Pohang-si ·

포항시: 역사

포항시: 역사

=== 선사 시대와 고대 ===
포항 지역에서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생활한 흔적이 확인된다. 영일만 일대에서는 장기면 산서리, 동해면 임곡리, 기계면 구지리, 기계면 하대리 등에서 구석기시대의 석기가 지표조사를 통해 발견되었다. 이러한 유적은 포항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한 지역이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청동기시대에는 정착 생활이 확산되면서 취락이 형성되었다. 흥해읍 초곡리, 오천읍 원리, 구룡포읍 석병리와 강사리 등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집터와 생활 유적이 발굴되었으며, 이후에도 포항 각지에서 다양한 청동기 유적이 지속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주민들이 농경을 기반으로 생활하며 마을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에는 포항 일대가 진한 12국 가운데 하나인 근기국(斤耆國)의 중심 지역이었다. 근기국은 토착 세력과 외부 이주 집단이 융합되어 형성된 소국으로, 냉천과 형산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와 해안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현재의 인덕동, 호동, 오천읍, 대송면, 동해면 일대의 여러 취락을 지배하며 영일만 지역의 정치·경제 중심 세력으로 발전하였다.
이후 신라 파사 이사금 시기에 근기국은 다벌국, 초팔국과 함께 신라에 편입되었으며, 포항 지역은 신라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 들어갔다. 신라는 동해안 방어와 북방 진출을 위한 전략적 거점으로 이 지역을 중시하였으며, 포항은 동해안의 교통과 군사상의 요충지로 자리 잡았다.
5세기에는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세력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481년 고구려 장수왕은 대규모 남진을 단행하여 신라 북부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미질부(현재의 포항 지역)까지 진격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포항이 신라 동해안 방어의 핵심 거점이었음을 보여 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940년(태조 23) 신라의 임정현(臨汀縣)이 영일현(迎日縣)으로 개칭되었다. 1018년(현종 9)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경주의 속현으로 편입되었으며, 고려 말인 1390년(공양왕 2)에는 영일현에 감무가 파견되면서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치가 강화되었다.
영일현은 농업과 어업을 주요 기반으로 하였으며, 동해안을 통한 해상 교역과 소금 생산도 이루어졌다. 또한 동해안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해안 방어의 거점으로 기능하였으며,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면서 해안 방어 체계가 강화되었다.
문화적으로는 불교가 확산되면서 사찰이 지역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고려 후기에 이르러 유교 교육도 점차 보급되었다. 이러한 사회·문화적 기반은 이후 조선 시대 영일 지역의 향교와 유교 교육이 정착되는 배경의 하나가 되었다.

지방 행정제도가 정비되면서 흥해·연일·청하·장기 등 여러 지역이 각각 독립적인 행정구역으로 발전하였다. 1417년에는 영일진이 설치되어 흥해·영일·장기 지역의 해안 방어를 담당하였으며, 해안 지역에는 통양포와 포이포 등에 만호가 설치되어 왜구의 침입과 해상 방어에 대비하였다.
형산강 하구와 영일만을 중심으로 해상 교통과 어업이 발달하였다. 당시 형산강 하구의 삼각주에는 해도, 상도, 대도, 송도, 죽도 등 여러 섬이 분포하고 있었으며, 이들 섬은 어업과 해상 교통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형산강을 통한 내륙 수운과 영일만을 통한 연안 해상 교통이 연결되면서 지역의 물자 운송과 교역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읍성으로는 흥해읍성과 영일읍성 등이 축조되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해안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진(鎭)과 만호진이 각지에 설치되었다. 이를 통해 영일만 일대와 동해안 지역의 군사적 방어 체계가 강화되었다.
교육과 유교 문화도 발전하였다. 연일향교, 흥해향교, 청하향교, 장기향교가 설립되어 지방의 유교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지역 사족들의 학문과 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특히 장기향교는 1398년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청하향교와 함께 조선시대 포항 지역의 교육과 유교 문화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95년(고종 32년) 지방 행정구역 개편으로 23부제가 시행되면서 동래부 흥해군과 연일군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896년 8월 4일 13도제가 시행되면서 경상북도 흥해군과 연일군으로 개편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포항항을 중심으로 곡물과 해산물이 집산되었으며, 일본과의 교역이 점차 활발해지면서 어업과 상업도 함께 발달하였다.
대한제국 시기 포항은 흥해군 포항면에 속하였으며, 영일만을 중심으로 동해안 해상 교통의 거점 역할을 하였다. 또한 광무개혁에 따라 항만과 통신 등 근대적 기반 시설이 정비되면서 점차 근대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1908년에는 호미곶등대가 건립되었다. 호미곶등대는 대한제국 시기에 건설된 대표적인 근대식 등대로, 동해안을 항해하는 선박의 안전 운항을 지원하는 중요한 시설이었다.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으며,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근대 등대 건축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포항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체제에 편입되었다. 당시 포항은 동해안의 주요 항구이자 농·수산물 집산지로 성장하면서 일본의 경제적 수탈을 위한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영일만을 중심으로 항만 기능이 확충되고 도로와 철도 등 교통망이 정비되면서 농산물과 수산물, 각종 물자의 반출이 활발해졌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연일군·흥해군·청하군·장기군이 영일군으로 통합되었으며, 흥해군 동상면과 연일군 북면을 합쳐 포항면이 설치되었다. 3년 뒤인 1917년 10월 1일, 포항동·학산동·두호동 등 3개 동을 관할하는 포항지정면이 설치되면서 지역은 급속한 성장의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들어 포항항은 현대적인 항만으로 정비되며 동해안의 주요 무역항으로 성장하였다. 일본은 어업과 수산물 가공업을 육성하였고, 일본인 이주민이 증가하면서 시가지도 확대되었다. 금융기관과 상업시설, 관공서 등 각종 도시 기반시설이 들어서면서 도시의 모습이 크게 변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발은 식민지 경제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지역 주민들은 토지조사사업과 각종 세금 부담, 노동력 수탈 및 강제 동원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행정적으로는 1931년 4월 1일 포항면이 포항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38년 10월 1일에는 형산면 등 인접 지역이 포항읍에 편입되면서 행정구역과 도시 규모가 확대되었다.
1940년대 태평양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포항은 동해안의 군사 및 물자 수송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이 시기 주민들은 군수물자 생산과 노무 동원, 징병 및 징용 등 전시 동원 체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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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lle: Text: Wikipedia – „포항시“, Autorinnen und Autoren (Versionsgeschichte), CC BY-SA 4.0 · Foto: Roadgo,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