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imatgeschichte · Yeosu-si ·

여수시: 역사

여수시: 역사

고조선 남해안권 중심도시(고조선 유물, 유적)
마한 원지국(전남 동부권 중심도시)
가야 다리국(상다리,하다리)
538년 (백제 성왕 16년) 원촌현, 돌산현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 해읍현, 여산현으로 개칭
940년 (고려 태조 23년) 여수현, 돌산현으로 개편
1479년 (조선 성종 10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 설치
1885년 (조선 고종 22년) 거문도 사건 일어남.
1896년 (건양 원년) 흥양군·낙안군·순천군·광양군에 있는 여러 섬에 남원부 돌산군(突山郡)을 신설하였다.
1896년 (건양 원년) 8월 4일 전라남도 돌산군으로 개편하였다.
1897년 (건양 2년) 6월 1 순천군 소속 율촌면·소라면·삼일면·여수면을 나누어 여수군을 신설하였다.
1914년 4월 1일 돌산군은 고흥군과 여수군에 분할되었다.
10면 - 여수면, 소라면, 율촌면, 삼일면, 쌍봉면, 화양면, 두남면, 남면, 화정면, 삼산면

1917년 두남면을 돌산면으로 개칭하였다.
1923년 2월 15일 여수면을 지정면으로 승격.
1923년 6월 1일 여수항 개항
1930년 12월 광주-여수 간 철도(오늘날의 경전선) 개통과 여수-시모노세키(하관) 간 '관려연락선' 취항.
1931년 4월 1일 여수면을 여수읍으로 승격하였다. (1읍 9면)
1949년 8월 14일 여수읍이 여수부로 승격함과 동시에 여수군 9개면을 여천군(麗川郡)으로 개칭하였다.
1949년 8월 15일 여수부를 여수시로 개칭하였다.
1964년 7월 28일 여천군 돌산면에 우두출장소(우두리·평사리)를, 남면에 연도출장소(연도리)를 설치하였다.
1965년 4월 19일 여천군 삼산면에 초도출장소(초도리)와 손죽출장소(손죽리)를 설치하였다.
1966년 4월 27일 여천군 화정면에 낭도출장소(낭도리)가 설치되었다.
1967년 1월 1일 이전의 법정동 26개를 그대로 행정동 26개로 확정하였다. 단, 신국동(新菊洞)의 경우 국동(菊洞)으로 바뀌었다.
1967년 6월 26일 여천군 남면에 안도출장소(안도리), 화태출장소(화태리·두라리·횡간리)를 설치하였다.
1969년 삼일항 개항
1970년 5월 29일 여천군 화정면에 개도출장소(개도리·월호리)가 설치되었다.
1973년 7월 1일 여천군 돌산면 경호리가 여수시로 편입되었고, 광양군 골약면 송장리가 여천군 율촌면으로 편입되었다. (여수시: 27동, 여천군: 9면)
1976년 9월 1일 여천지구출장소 개소. (여천군 삼일면, 쌍봉면 일원)
1979년 5월 1일 여천군 화정면에 여자출장소(여자리)가 설치되었다.
1980년 12월 1일 삼일면이 삼일읍으로, 돌산면이 돌산읍으로 각각 승격하였다. (여수시: 27동, 여천군: 2읍 7면)
1986년 1월 1일 여천지구출장소가 여천시로 승격되었다. (여수시: 27동, 여천시: 7동, 여천군: 1읍 6면)
1987년 1월 1일 여천군 율촌면 상여리와 송장리가 각각 상봉리와 여동리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88년 3월 1일 여천군 돌산읍 죽포출장소(죽포리·서덕리·율림리·둔전리)가 설치되었다.
1997년 7월 25일 여수시의 과소행정동이 1차로 통폐합되었다. 공화동·수정동이 오동동으로, 고소동·중앙동이 중앙동으로, 교동·충무동이 충무동으로, 동산동·군자동이 종고동으로, 광무동·오림동이 광림동으로, 봉강동·서교동이 서강동으로, 만흥동·오천동이 만오동으로 통폐합되었다. (여수시: 20동, 여천시: 7동, 여천군: 1읍 6면)
1998년 2월 1일 여수시의 과소행정동이 2차로 통폐합되었다. 종화동·관문동과 종고동 일부가 동문동으로, 중앙동과 충무동 일부가 중앙동으로, 충무동·종고동 각 일부와 연등동이 충무동으로, 신월동·경호동이 월호동으로, 봉산동·남산동이 대교동으로, 만오동·덕충동이 만덕동으로 통폐합되었고, 오동동이 한려동으로 개칭되었다. (여수시: 14동, 여천시: 7동, 여천군: 1읍 6면)
1998년 4월 1일 여수시, 여천시, 여천군을 도농복합시인 여수시로 통합하였다.(삼려(三麗)통합) 옛 여천시청을 본청사로 하고, 옛 여수시청을 2청사로, 옛 여천군청을 3청사로 분산배치하였다. (1읍 6면 21동)
1999년 3월 1일 상암동을 삼일동으로 합동하였다. (1읍 6면 20동)
2007년 5월 31일 여수시의 10개 출장소 중 3개(돌산읍 우두·죽포출장소, 화정면 개도출장소)를 제외한 나머지 7개 출장소를 민원중계소로 격하시켰다.
2012년 5월 12일 여수 세계엑스포 박람회를 개최하였다.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항거한 여수현령 오흔인의 5년 반기로 조정에서는 그 죄 값으로 여수(麗水)라는 큰 고을을 1397년(태조5년)에 폐지시키고 돌산 나루터 구실만 하도록 순천부에 예속시켜 버리니 여수라는 지명도 500년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1차 복현운동: 숙종때 지역대표 4사람이 서울로가 신문고를 치고 고통을 아뢰었으나 상소가 무산되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여수민은 끈질기게 추진하여 숙종의 윤허를 얻어 1696년 여수 도호부로 승격하게 되었다. 300년 만에 현을 찾았다. 그러나 여수현령 최극태가 암행어사에 끌려가 다시 순천부로 환속되었다.
2차 복현운동: 3년 뒤 순천 유생의 상소. 1725년 지평 이근의 상소로 영조 1년 여수 도호부가 설치되었다. 1년후 죄의정 홍치중 어영대장 이봉상 간계로 일 년도 넘지 못하고 혁파 되었다.
3차 복현운동: 1750년 (영조26)여수현은 여수 도호부로 세 번째 복현되었다. 24년 만에 복원된 것은 여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귀울려 왔는가를 알수 있다. 백성들이 상소 하였고 임금은 사리를 밝게 판단하여 승지 이형원에게 여수 도호부사겸 전라좌도 수군절도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또 순천에 의해 1년도 못되어 여수현은 혁파되고 순천부로 환속하게 되었다.
1864년(고종원년)에 정종선(호는 운초. 병인양요 때 백의로 국란을 맞이하여 ‘남주종유’로 추앙받음. 율촌출생)이 임금에게 올린 상소가 효시가 되어 501년이 지난 1897년에 담양군수 유기완의 차개비지운응시지고여(此豈非地運應時之古嶼)=‘이 어찌 땅의 운이 시대의 운을 따라가지 않으리오’라는 호소로 삼복삼파(3번 복현, 3번 폐현) 끝에 여수의 완전한 복현과 지명을 되찾았다.
이 과정 중 여수에 소속되어 있던 용두면 지역은 여수로 환원되지 않고 순천에 잔류 되었다가 1914년 군면폐합때 해촌면과 합쳐서 해룡면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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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lle: Text: Wikipedia – „여수시“, Autorinnen und Autoren (Versionsgeschichte), CC BY-SA 4.0 · Foto: Hawkinsp,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