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시: 역사
=== 고대, 중세 ===
지금의 영등포, 금천 지역과 마찬가지로 고구려 장수왕 이후로 잉벌노현(仍伐奴. 순우리말 '늠내')에 속했으며 통일신라때 곡양(穀壤)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고려때는 금주(衿州)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명칭이 금주에서 금천(衿川)으로 바뀌었고 태종 14년(1413년)에 과천과 병합하여 금과현(衿果縣)을 만들었다가 두어 달 만에 혁파하고, 또 양천과 병합하여 금양현(衿陽縣)으로 만들었는데 한 해 만에 혁파하였다. 태종 16년(1415년)에 금천현(衿川縣)으로 고쳐서 현감을 두었고, 세조 때에 과천과 병합했다가 얼마 못 가서 복구하였다. 이후에는 금천(衿川)이라고 하였는데, 금천현은 현내면, 동면, 서면, 남면, 상북면, 하북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금의 광명시 지역은 금천현 남면과 서면에 속했는데, 남면은 지금의 광명시 서부, 서면은 지금의 광명시 동부에 해당된다. 참고로 현내면은 지금의 금천구, 상북면과 하북면은 지금의 영등포구, 동면은 지금의 관악구와 동작구 일부에 해당한다.
1795년(정조 19)에 금천현이 시흥현으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 32년) 윤 5월 1일, 시흥현이 시흥군으로 개편되어 인천부(仁川府)에 속하였고, 이듬해 다시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대개편으로 시흥군 남면과 서면이 서면으로 통합되었다. 이때 여러 마을의 지명이 통폐합 되어 지금의 광명동, 철산동, 하안동, 노온사동, 가학동, 소하동, 일직동이라는 지명으로 굳혀졌다.
인근의 영등포 지역이 1936년, 1949년에 차례대로 경성부(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고 인접지역인 지금의 금천지역(당시 시흥군 동면)이 1963년에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이외에도 광명시와 인접한 고척동, 개봉동, 천왕동은 이 시기에 서울로 편입되었다. 현대적인 광명시의 역사는 1963년 9월 17일 시흥군 서면 광명리, 철산리, 하안리가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건설부 고시 제547호)에 편입되면서 주택지구로 개발되면서 시작되었다. 광명리(지금의 철산1동인 철산리 일부 포함)는 서울 개봉지구의 일부로서 시가지로 개발되었고 그 대표적인 주택단지가 현재의 광명동 한진아파트 단지 자리인 광명아파트 단지였다. 철산리는 서울 구로공단을 배후로 하는 택지지구로의 개발이 계획되었다가 시 승격 이후에 완성되었다. 이 시기에 광명지역은 서울특별시의 통화권(지역번호 02)에 자연스럽게 편입되었다. 1970년에 광명리, 철산리 지역이 시흥군 서면 광명출장소로 지정되었고, 1974년에는 시흥군 직할 광명출장소가 되었다. 1979년에는 서면이 소하읍으로 승격되었다. 이 일대(특히 광명동, 철산동)를 서울특별시 산하 기초시로서의 광명시 혹은 당시 서울의 신생 자치구인 구로구에 편입하는 방안이 검토되었고 1978년에는 내무부에서도 진지하게 서울 편입을 검토(장관 결재 문건)했을 정도로 서울특별시로 편입시키는 안이 여러 번 고려된 적 있었으나 서울집중억제를 위한 전두환 정권의 위성도시 육성 정책으로 인하여 무산되었다. 이는 지금까지도 서울 편입 논란의 근원이 되고 있다.
서울 편입 무산으로 결국 1981년에 시흥군 광명출장소 지역을 포함한 소하읍이 광명시로 승격되었다. 시 승격 이후에 서울특별시를 배후로 하는 본격적인 베드타운으로 성장하여 철산동, 하안동 일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으며, 2010년 전후로 소하동에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